마음으로 품은 딸을 시집보내고

by 홍영호 로벨도 posted Oct 04,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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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어제는 인연으로, 아주, 특별한 인연으로 마음으로 품은 딸의 손을 잡고 신부입장을 했습니다.
처음 해보는 노릇이라 드레스를 밟을까, 덜덜 뜨는 딸을 진정시키느라 긴장했습니다.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쯤이면 날 아는 분들은 무슨 딸인가 하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주 특별한 인연으로 마음으로 품은 딸이기에 우리 부부 외는 아는 이가 없습니다.

이 딸은 탈북한 여성입니다.
자세한 사연은 묻지 않았지만 북한에는 부모도 있습니다, .
탈북했다 다시 잡혀 북으로 끌려가 수용소 생활을 하고,
다시 탈출하여 중국에서 단란한 가정도 꾸미고 아이도 하나 두었답니다.

그러나 탈북자로 언제 공안에게 잡혀 북으로 소환될지 모르는 신세로 전전긍긍했답니다.
마침 중국인 남편도 자식도 하나 낳아주었으니 중국생활은 잊고 한국으로 가라고 했답니다.
자식과 고마운 마음을 뒤로 하고 몽골 국경을 통해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하게 되었답니다.
함께한 다섯 명중 두 명이 실종된 채 딸은 몽골 수비대에 발견되어 남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딸이 우리 집과 인연이 된 것은 하나눤에서 소정의 교육을 모두 끝낸 후였습니다.
탈북자들은 사회에 나오기 전에 한국 가정에서 한국생활을 경험하는 생활을 갖습니다.
집사람이 관여하는 수도회에서 희망자를 뽑아 연결을 시켜주는데 집사람이 손을 들었답니다.

우리 집을 다녀간 사람은 네 명이었는데 이 딸만 4년 동안 연락을 해주곤 했습니다.
얼마나 살가운지 만나자 마자 집사람과 나를 어머니,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이렇게 부녀의 연을 맺은 것은 딸의 명랑한 성격과 적극적인 생각 덕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외롭고 남쪽 생활에 빨리 익숙해지기 위한 것이리니 생각했습니다.
일 년에 몇 번 만나진 않았지만 어머니, 아버지로 생각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남쪽에서 열심히 살고 언제가는 결혼까지 할 것이며 그때 어머니 아버지로 모시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딸이 4년 동안 한국에서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며 대견해 했습니다.
그러다가 올 늦봄에 좋은 상대를 만났다며 가을에 결혼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로 식장에 참석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날이 어제였습니다.
약속대로 아버지로 식장을 향했지만 막상 아버지로 선다는 게 영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했습니다.
가슴에 꽃을 달고 하얀 장갑을 끼고 하객을 막으며 어색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딸이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덕인지 식장은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로 붐볐습니다.
조금씩 식장 분위기에 익숙해지고 하객들도 우리를 신부의 부모로 대우해주어 진짜 딸의 아버지가 되어갔습니다.

결혼식 시간이 가까워오면서 한가지 문제로 고민이 되었습니다.
신부가 입장할 때 내가 직접 델리고 들어가야 하는지 마는지.
신부를 직접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 왠지 마음에 걸려 고민 끝에 신랑과 동시에 입장하라고 했습니다.
딸은 그러고만 했지만 웬지 영 찜찜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일방적인 결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딸에게 가서 나와 같이 입장하겠느냐고 했습니다. 딸의 얼굴이 환히 펴이면서 좋아했습니다.
생각을 바꾸 것이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하객들에게 아머지의 손을 잡고 입장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입장할 시간이 되어 딸과 함께 출발선에 섰습니다.
처음 해보는 일인데 연습도 하지 못했기에 실수하지 않을 조바심이 났습니다.
딸은 더 떨고 있었습니다. 숨 한번 크게 쉬고 딸의 손을 꼭 잡아주며 안심을 시켰습니다.

신부입장이 탈 없이 끝나고 신랑 신부로부터 큰절까지 받았습니다.
조금은 형식적인 신부의 아버지 노릇이었지만 이쯤 되니 친 아바지의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딸은 지난 4년 동안 정말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로서 뭘 어떻게 해줘야 할지 지금부터 고민을 해봐야 하겠습니다.